1/31/2018

[서문] Les Flâneurs : 산책자들

Les Flâneurs : 산책자들
2013.01.24-2013.03.02
임소담, 유창창, 이해민선 
갤러리 스케이프 

"완벽한 산책자에게 있어 수많은 사람들 속에, 물결처럼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 한가운데 거처를 마련한다는 것은 무한한 기쁨이다. ...집 밖에 있으면서도 모든 곳에서 자기 집 안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 것. 세계를 보고, 세계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세계로부터 숨어 있는 것. ...관찰자는 모든 곳에서 익명성을 즐기는 군주이다." (보들레르,『낭만파 예술』, 파리, p.64-65「현대적 삶의 화가」) 

한 플라뇌르(Flâneur)가 거리 속 사람들 틈을 휘휘 저어 한가롭게 빠져나간다. 초점 없는 망연한 표정으로 빠르게 눈 앞을 스쳐 지나가는 광경을 관찰한다. 머릿속 관념들이 풍경과 뒤섞이기 시작한다. 장식과 묘사는 사라지고 암시로 가득 찬 풍경만 남는다. 어느새 그는 풍경의 표면 그 안쪽을 걷기 시작한다. 산책자란 뜻을 가진 '플라뇌르'는 보들레르가 19세기 중반 파리에서 일어나는 근대화 현상을 지켜보는 자들을 지칭한 것에서 유래되었다. 본 전시에서 소개하는 세 명의 산책자, 임소담, 유창창, 이해민선의 작품은 현 시대의 풍경을 관찰하며 포착한 관념들을 은유적인 시각언어로 풀어놓고 있다.

첫 번째 산책자: 낯섦을 수반한 익숙한 풍경 
임소담은 여행하면서 찍은 스냅 사진, 산책하며 발견한 일상 이미지, 다큐멘터리에서 본 장면들을 수집한다. 수집된 풍경 이미지들은 심리적으로 연상되는 다른 풍경으로 즉흥적으로 대체되거나, 오래부터 그의 기억 속에 체화 된 장면들과 조우하며 새로운 장소성(placeness)을 띠게 된다. 예를 들어 작품「Mother」에 보이는 텅 빈 주차장에 혼자 앉아 있는 길고양이는 작가의 무의식 저 너머에 숨어있던 표상된 존재일 수 있다. 의미를 유추할 수 없는 작품 제목 또한 그림 속 풍경을 단순한 다큐멘터리적 기록이 아닌 모호한 단상이 스며든 장면으로 읽혀지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선택한 '보편적이고 익숙한 소재'는 보는 이로 하여금 각자의 기억 속 풍경들을 쉽게 환기시킨다. 그리하여 임소담이 그려낸 풍경들은 지극히 개인적이나 타자를 향해 열려있는 장소가 된다.

두 번째 산책자: 낙체(Falling Body)들로 가득 찬 풍경
주변의 인물, 동물 및 사건들이 재조합 된 유창창의 작품 속 가상 풍경은 모든 비극의 집합체, 다시 말해 디스토피아다. 그는 우리가 꿈꾸고 바라는 유토피아를 파괴하는 방법으로 디스토피아를 표현한다. 예를 들어 성공을 상징하는 뉴욕의 지도 위에 자신의 정액을 흩뿌리고 모든 텍스트를 알아볼 수 없도록 지워버린다. 또한 작가가 의도하는 파멸의 욕망을 대변하는'리틀 피플'들이 알록달록한 산야를 넘어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 독특하게도 작가는 인간을 중력에 얽매여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져버린'낙체'들로 간주한다. 중력을 우리의 몸에 포함되어 있는 불가항력적 감각으로 인식하고 이를 인간이 짊어진 생의 무게감으로 치환한 결과다. 그의 관점에서 인간은 천상(유토피아)에서 떨어져 이미 천하(디스토피아)에 살고 있는 피조물이다. 결론적으로 그의 눈에 비치는 세상은 낙체들로 가득 찬 불안과 우울로 침잠된 디스토피아로 볼 수 있다.

세 번째 산책자: 무와 유가 공생하는 개념화 된 풍경

식물과 각목, 비닐, 나뭇가지들로 엮어 만든 이해민선의「직립 식물」연작은 도시 속 나무와 식물들이 죽지 않게 지탱해주는 각목 지지대에서 비롯된 성찰의 결과물이다. 작가의 표현대로 '한때는 나무였던 것이 다른 나무를 지지하고 있는' 이 형상은 흡사 동물과 같이 느릿느릿 걸어 다닐 것만 같다. 그는 황폐화되거나 퇴색된 도시 속 대지에 흡사 동물의 형상 같은 이 직립 식물들을 '살아있게 보이도록' 두는데, 이들로 인해 문명과 인간에 의해 사회적 측면에선 죽은 대지는 쓸모와 생기를 얻는다. 무기물과 유기물 사이 정의할 수 없는 모호한 것들이 서로 도우며 존재하고 있는 모습이 어딘가 애처롭다. 작가의 성찰로 탄생된 '개념화 된 풍경'에 나타나는 이러한 패러독스는 생명체의 존속과 공존에 관해 생각하게 만든다. 나아가 인간이 생명을 대하는 이항대립적 태도에 질문을 던진다. 보들레르의 표현대로 많은 예술가들은 현대의 '어떤 생활'을 유유히 활보하며 탐구하는 익명의 산책자들이다. 그들은 인식하지 못하면 사라져버리기 쉬운 풍경의 단편을 '또 다른 세계'로 확장시키는 면밀한 관찰자이다. 이번 전시는 일상에서 벌어지는 현상들을 자신의 주관적인 사유체계에 녹여내는 세 명의 산책자들이 가진 작가적 태도와 미적 감수성에 주목해보았다. 작가가 만들어 낸 정서적 공간을 좇아가다 보면, 일상적인 풍경이 나만의 심적 풍경(Psychological Scenery)과 부딪히며 생성되는 다양한 찰나들을 경험해볼 수 있을 것이다.

text by 봄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