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3/2018

[리뷰] 소액다컴 선정자 X-PRESS SEOUL 리뷰_연약하지만 분명한 면


소액다컴 선정자 X-PRESS SEOUL 리뷰
 
연약하지만 분명한 면

 
경계를 바라보는 것을 좋아한다.
선과 선이 만나는 경계, 삼 면이 마주 닿는 공간의 모서리.
-모서리 이미지를 수집하는 실비의 메모

매거진 <엑스프레스 서울>의 지면
<엑스프레스 (X-Press)>는 조르주 페렉의 소설 <사물들>의 주인공 실비와 제롬의 소비와 취향, 젊음과 욕망을 대변하는 잡지다. 페렉의 소설 속 배경이 포스트모더니즘 혁명의 시기로 많이 다뤄지는 1960년대의 프랑스라면, ‘팀 엑스프레스가 만든 잡지 <엑스프레스 서울(X-Press Seoul)>2018년 서울에 사는 젊은이들의 현실을 표방하며, 이들의 취향을 엿볼 수 있는 사물들을 제시한다. 배움의 즐거움을 알려준 흔들의자, 기다리는 법을 배운 필름 카메라, 여행에서의 여유가 새겨진 백팩 등 사적인 사연이 지면을 빼곡하게 채우고, 이러한 사물들의 이미지는 그래픽 효과나 콜라주 기법으로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게 편집되었다. 차곡차곡 번호를 매겨 아카이브의 성질을 드러낸 물건도 있다.
하지만 페렉의 소설 속 <엑스프레스>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가 느껴진다. 오히려 욕망, 소비 지향, 사치스러움과는 거리가 멀다. 사물의 주인공을 둘러싼 상황을 가늠케 하는 솔직한 문장과 불안을 아름답게 포장하지 않은 기록들. 이들은 <사물들>의 실비와 제롬이 탐독하며 현대소비사회를 욕망하던 잡지가 아닌, 삶의 고민을 표상하는 실비의 초상을 싣기로 선택했다. 현실과 타협을 덜 하기 위해 다른 기술을 배워보며, 순간을 수집하고, 지루한 업무 속에서 취향을 확장하는 방법을 찾는다. 또한, 이 모든 걸 쉽게 갖출 수 있을 것처럼 유혹하는 주변에 아슬아슬하지만 곧은 선을 긋고, 자신을 대변하는 사물들을 정성 들여 사유하는 행위로 일상을 지켜나간다.
면과 면 사이 1
팀 엑스프레스는 이 얇은 잡지를 전시 공간으로 입체화한다. 잡지 표지에 그려진 위, 아래로 살짝 어긋난 두 개의 직육면체는 위에서 내려 본 1점 투시의 정육면체를 반으로 쪼갠 듯한 형상인데, 이는 각각 전시 공간에 구현한현실의 방이상의 방을 의미한다. 전시장 입구에서 두 방의 안쪽은 보이지 않는다. 반투명한 비닐 막으로 제작한 사각형의 면면에 사물들의 그림자가 아스라이 비친다. 비닐 막의 이음새는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으면서도 소재 특유의 유동성이 느껴진다. 모서리를 돌면 그림자의 아우라는 사라지고 현실의 방이 나타난다. 독자는 자연스럽게 관람객이 된다.
현실의 측면
방에 놓인 빈티지 스타일 조명과 하얀 철제 옷걸이, 싱글 사이즈 침대와 책상, MDF로 만든 책장은 이케아와 무인양품 냄새가 섞인 누군가의 작은 원룸을 상기시킨다. 실비의 사물들인 수경 야자, 조개껍질, 이로시주쿠 잉크, 블루 계열의 무지 셔츠 등은 가구와 소품에 어울리도록 디스플레이 되어 있다. 반면 어떤 실비의 사물들은 독특한 아우라를 내뿜는다. 실제 고양이 크기의 모형 판넬, 남산 타워 이미지를 콜라주한 입방체, 만두를 술에 재운 그로테스크한 술병, 노란 마스크에 붙은 솜 덩어리가 곳곳에 놓여 현실적인 방 재현에 미세한 균열을 낸다. 원하는 것을 소유하지 못한 좌절감, 서울이 아닌 고향을 향한 노스텔지아가 짙게 느껴진다. 이렇듯 물건과 물건 사이에서 느껴지는 기묘한 마찰과 이질성은 이름만 모두 실비일 뿐 실상 개별적인 각자의 존재 이유로 이 방에 초대되었음을 깨닫게 한다.
면과 면 사이 2
팀 엑스프레스의 멤버들은 대부분 졸업예정자이거나 이제 막 졸업한 상태였다. 이들이 일상을 사는-혹은 버티는- 방법 중 학생과 사회인 그 중간에 서 있기를 제안한 이유는 어쩌면 문화, 예술계 내에서 통째로 매립되지 않기 위한 자기 보호의 방법이 아닐지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이상의 측면
이상의 방은 하늘거리는 하얀 리넨위에 에메랄드빛 웨이브가 파란 네온과 함께 투사되면서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기획자의 말에 따르면, 도달할 수 없는 거리감과 만질 수 없는 상태를 표현했다고 한다. 그렇다면실체 없음에 가까운 저 환한 빛을 희망이라고 여기긴 어렵다. 아무것도 욕망할 수 없는 상태가 실패와 분노로 바로 치환되지 않도록, 수긍과 체념을 쉴 새 없이 오가며 반짝거리는 물결을 만들었을 양가적 시선이 느껴진다. 이상의 방은 안으로 들어갈 수 없게 만들었다. 현실과 이상이 하나였다가 둘로 나뉘고 어긋나 분리되어 버리는 찰나를 우리는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또 다른 현실일까? 아니면 이룰 수 없는 꿈일까.
관람객은 모호한 이상의 방에서 빠져나와 전시장 출구로 나가기 전 현실의 방을 다시 지나쳐야 한다. 사물들은 연약하지만 분명하게 묻는다. 당신을 꿈꾸게 하는 사물은 무엇입니까. 어느새 관람객의 이름은 또 다른 실비가 된다.

프로젝트 명: X-PRESS SEOUL
참여작가/팀명: TEAM X-PRESS, 이지산
일시: 2018831~ 99(오프닝 316)
장소: 서교예술실험센터 B1 다목적실
text by 봄로야 
COPYRIGHT © Bom,roya / 서울문화재단 서교예술실험센터 All rights reserved.

8/17/2018

[리뷰] 2018 소액다컴 1차 발표회


리뷰2018 소액: 두 번째 자유발표의 날

 
지난 5월 공모한 홍대앞 작은예술지원사업 소액(이하 소액다컴)1차 선정자 자유 발표회가 75일 서교예술실험센터 지하 다목적실에서 열렸다. 9팀의 다채로운 작업 내용을 들어볼 수 있는 자리였으며, 서로의 프로젝트에 관한 질문과 답변이 촘촘하게 이어졌다.
 
1. 석다슬, 조소희, 한우리 작가의 아기 돼지 독립기프로젝트는 늑대가 아기 돼지를 잡아먹기 위해 입김을 불어 집을 날리는 우화 아기 돼지 삼형제의 이야기를 돼지가 사는 각각의 집의 형태에 맞춰 월세, 전세, 자가로 재해석하여 만든 게임이다. 우화 특유의 가벼움과 귀여운 이미지로 구성될 이 게임은 젠트리피케이션, 낮은 임금 등의 현상을 상징하는 늑대로부터 대항할 수 있는 자신의 현실과 위치를 가늠해볼 수 있다고 한다. 게임의 방식과 결말에 관한 여러 질문과 의견이 오갔고 그만큼 현세대를 압박하는 주거 문제에 대한 온도를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2. 본 프로젝트를 설명하기에 앞서 함께 관람한 전작 구경꾼의 대사가 마음에 남았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언젠가 그 순간을 맞이할 텐데 내가 옆에서 뭘 해 줄 수가 없잖아요.” 나는 당신을 만나지 않았어요안미선, 안정윤 작가가 친동생의 자살 사고에 대해 주고받는 대화를 엮어, 타인의 죽음을 어떻게 애도할 것인지를 담아내는 작업이다. 작가는 색과 소리, 산문시 등의 매체를 이용하여 지금은 부재한 동생을 화자의 자리에 위치시킨다. 또한, 가까운 이의 죽음을 실마리로 삼아 주변의 여러 사람이 생각하는 죽음을 기록하고,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를 초청하여 함께 토론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할 예정이라고 한다.
 
3. 윤하민 작가의 No man’s land : 다른 서정의 풍경은 기존의 서정성이 환기하는 목가적 풍경을 현시대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치환하여, 서정성의 의미를 작가의 표현에 따르면 갱신하고자 하는 작업이다. 작업의 소스는 게임 그래픽, 스포츠 관련 유튜브 클립이나 셀피 영상 클립을 활용할 예정이다. 작가는 추출한 영상 이미지에 상충하는 인물 및 이야기를 개입시키고 이를 통해 발현될 낯선 네러티브와 풍경에서 요즘의 서정적인 감각의 풍경을 연출하고자 한다. 디지털 이미지의 중첩과 합성을 이용한 다른 작가들의 작업이 불러일으키는 정서와 어떤 맥락과 담론으로 만날지 기대된다.
 
4. 사실과 다른 헛소리’, ‘바람이 마이크에 스치는 소리’, ‘화재로 인한 검은 연기등은 쉽게 버리거나 잊힐 수 있는 파편들이다. 이홍한 작가는 이러한 시끄럽고 방해되며 편치 않고 통제되지 않는 노이즈와 일상에 스쳐 지나가는 이미지를 붙잡아 전시장에 들여온다. 전시형 프로젝트 -선택 이미지에 대한 세 가지에 사용되는 이미지의 취사선택은 관찰자 시점의 개인적 경험에 입각한 기준에 따르며, 작가와 관람객이 채집한 이미지가 생성되는 구조를 역추적하게 된다. 이렇듯 작가는 그의 표현에 따르면 흩어진 이미지들을 합리화하여 배제되는 주변, 권위주의적 일상, 스펙터클을 위시한 이미지에 대항한다.
 
5. 27그랜체스터(멜로디박, 민킴) Contemporary Waste (동시대의 쓰레기)는 쓰레기를 수집하여 초상 사진을 찍고, 하울(Haul:인터넷 방송 등에서 구매한 물건을 품평하는 내용을 담은 영상을 지칭하는 용어) 및 물물교환 방식의 경매 행사를 여는 퍼포먼스로 이를 통해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을 표상하는 퍼포먼스이다. 현대 미술(Contemporary Art)을 표방한 듯 보이는 제목과 행위는 기능을 상실한 쓰레기에 의미를 부여해서 소비 체제와의 접점을 만들려는 작가의 의도와 잘 어울린다. 이들이 예상하는 쓰레기를 통한 시대 고찰이 관람객의 호응과 기대와 어느 정도 맞닿을 수 있을까? 발랄하고 흥미로운 퍼포먼스가 예상되는 만큼 이에 대한 작업적 호기심을 자아냈다.
 
6. 신관수 작가의 전자기 조합 00!는 노이즈, 엠비언트 등 실험적인 사운드 아트의 색다른 즉흥 합주를 제안한다. 페스티벌의 형식을 띤 이 공연은 섭외한 뮤지션의 타임라인은 확정하되, 이벤트를 열어 악기나 전자기를 이용해 누구나 즉흥 연주에 참여해볼 수 있다. 시각적 장치의 여부가 궁금하다는 질문에, 작가는 조형물을 무대에 설치할 예정이며 자율모금통일 수도 있다는 재치 있는 대답과 함께, 전자 음악 씬이 국내에서도 점점 활발한 추세를 보이지만 뮤지션 사이의 네트워크나 공연 할 수 있는 플랫폼은 여전히 부족하다는 소신을 밝혔다. 본 공연에서 선보일 각양각색의 실험 음악과 노이즈 즉흥 협연을 기대해본다.
 
7. 대실 몸의 대화자가 진단집단 감정 배출의 여러 형태를 연구하는 예술치유 집단 <몸의 대화>의 프로젝트로서 자신의 찌질함, 감추고 싶은 비밀이나 고민을 집단 놀이 방식으로 배설하는 자리를 마련한다. 프로그램 이해를 돕고자 나눠준 종이에는 누군가 털어놓은 비밀이 적혀있었고, 일상의 사소한 고민부터 말하기 어려운 트라우마들이 골고루 섞여 있었다. 모텔의 대실 방식을 전시 대관의 방법으로 택했는데, 기존에 실행했던 자료 이미지에서 드러나는 미러볼, 화려한 조명 등을 이용한 강렬한 공간 구성과 가면을 쓴 은밀한 참여자들의 제스처가 모텔 특유의 공간성과 어떻게 어울릴지 상상하게 만든다.
 
8. 조우리 작가의 실험.1은 자신의 신체 내부로부터 실제로 감각하고 있는 부재감을 물리적인 공간으로 구현해보고자 한 시도이다. 신체 내부의 감각과 상응하는 질료인 시멘트, 유리, 드론 등을 이용하여 공간 내 소리를 굴절시키고 진동을 만들어 관람객이 작가의 신체 내부를 느끼게 하고, 나아가 신체를 위한 더 나은 공간의 형태를 유추해보는 것이 이 실험의 목표라고 한다. 실질적으로 가시화될 사물의 질감과 배치 방식에 관해 더 듣고 싶었으나, 작가가 부득이하게 참석하지 못해 협업자가 대신 발표하여 다소 아쉬움이 남았다.
 
9. 언어가 지시하는 것에서 벗어난 몸은 어떤 상태와 형태를 지닐까? 일상에 대한 감각과 운동을 춤으로 기록하고 번역해보는 허윤경 작가의 일상번역기: 좀 더 긴 하루는 매일 반복하는 일상적 행위들에서 춤으로서의 움직임을 재발견하는 공연이다. 작가가 자유 발표용으로 준비한 스크립트에는 샤워하는 사람, 지하철의 탄 사람을 각각 텍스트로 묘사했는데, 답을 알기 전까지 이 문장들은 개인의 상상에서 맴도는 추상적인 몸짓으로 남는다. 작가는 정체 없는 움직임에 의도를 부여하고 주관적인 일상성과 시간성에 대한 관람객의 폭넓은 동의를 얻기 위해, 페이스북 등 온라인 채널 등에서 일상에 대한 말과 글을 사전 수집할 예정이다.
 
소액다컴은 장르 구분 없이 복잡한 지원 방식이나 정산을 최소화하여 창의적인 예술실험 실행을 응원하는 서교예술실험센터의 대표적인 지원사업이다. 이번에 발표한 9팀도 지난 3월 소액다컴 공모처럼 미술, 음악, 무용 등의 장르 안에서 다양한 교류와 실험, 해프닝 방식의 다원적인 접점을 살펴볼 수 있는 프로젝트가 다수였다. 백만 원의 지원금이 예술가들에게 작지만 의미 있는 씨드머니가 되어 작업의 완성을 향한 에너지가 되길 응원한다.
 
*소개한 아홉 팀 중 일곱 팀의 프로젝트가 소액다컴 지원을 통해 10월부터 발표된다. 프로젝트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서교예술실험센터 카페와 SNS를 통해 공지된다.
 
text by 봄로야 
COPYRIGHT © Bom,roya / 서울문화재단 서교예술실험센터 All rights reserved.

4/11/2018

[포럼] 새로운 반복을 위한 하이픈(hyphen)


2018 프린지 페스티벌 올모스트프린지: / 예술가에게 필요한 공간은 어디인가? /

새로운 반복을 위한 하이픈(hyphen)

. 봄로야 (시각 예술 작가, 기획자)

* 이 글은 기획팀과의 사전 논의를 거쳐 개인적인 경험에서 비롯한 공간사용법을 다룬다. 주로 시각 예술 분야와 관련하여 회고한 에세이에 가깝다. 시점이 있다. 각주를 본문처럼 활용하였다. 각주 1, 6, 8번은 직접 인용, 나머지는 글에 따른 보조글로 덧붙였다.

약속된 미래가 제때 도착하지 않은 곳마다 폐허가 생겨났지만,
현재를 과거로 밀어내고 그 자리에 미래를 소환하려는 몸부림은 멈추지 않았다.
미술이 폐허와 대면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1]

1.

2016년 소위 신생공간으로 인식되는 탈영역 우정국에서 개인전을 열고 싶은 이유는 우체국이었던 과거의 시간이 전시장에 흔적처럼 묻어있고, 이곳에서 진행한 전시 및 프로그램의 장르가 다양했기 때문이다. 개인전의 주제는 작업을 지속하는데 느낀 불안과 두려움을 중심에서 변두리로 생활의 반경을 옮기며 맞닥뜨린 개발도시의 풍경과 연결한 프로젝트였다. 음악, 영상, 목소리, 글 등 장르별 종사자와의 협업 방식은 탈영역 우정국의 공간적 특성과 상당 부분 어울렸다고 생각한다.[2] 이 같은 나와 공간의 상생 구조를 이번 포럼과 관련하여 신생공간의 특성과 연결 지어 보고자 한다. 한 예로, 2009년 보안여관[3]에서 열린 전시 <휘경, 사라지는 풍경>(2009)은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에 거주하거나 작업을 하는 작가 6인이 재개발로 철거되는 도시 광경을 사유했다. 전시를 직접 보지 못했지만, 주제와 보안여관의 역사, 건물의 골조가 거칠게 드러난 공간의 분위기와 조화로웠을 것 같다. 내가 전시 장소를 탈영역 우정국으로 선택한 이유와 다소 유사한 부분이 있다. 그런데 만일 탈영역 우정국과 보안 여관 중 한 곳에서 개인전을 열어야 한다면(행복한 가정) 나는 어느 곳을 선택했을까? 아마도 탈영역 우정국을 염두했을 것이다. 거주지역에 생뚱맞게 위치한 이질감과 어느 정도 구축된 화이트 큐브의 전시장 분위기가 자칫 도시성으로 치우치기 쉬운 작업 주제를 중화시켜주고, 작업에 담긴 사적인 작가의 생활과 고민이 그곳을 드나드는 작가나 관람객의 층위와 더 적합했기 때문이다. 공간 운영자와의 교류가 더 쉽고 익숙했다는 점도 지나칠 수 없다.

2010년도 이래로 생성과 종료를 반복하고 있는 신생공간[4]은 주류와 비주류, 권력의 재분배 기준으로 판단될 여지가 큰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중반에 생긴 대안공간과는 다른 양상으로 해석된다.[5] 많은 신생공간은 그저 전체 미술계에 연결link만 되어있는 채로 작가와 전시, 공연 등이 지나가는 통로를 구성한다.[6] 예술가로서의 작업 환경과 활동 반경을 전시 공간에 포함하여 맥락화하는 방식을 목격하며, 우선 나의 관람 태도를 바꿔야 했다. 예약해야만 방문할 수 있거나 창문을 넘어 들어가야 했다. 단지 전시를 보러 갔을 뿐인데 누군가의 작업실에 침입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내가 적극적으로 개입이 될 때가 있지만 그대로 투과되어버릴 때도 있었다. ‘라는 존재가(예술가이든, 관람객이든) 굳이 필요하지 않을 때도 있다는 뜻이다.

이 낯선 기분은 분주히 돌아가는 주류 담론의 판을 위시하지 않으면서도 서로의 장력을 확인하고 관계를 모색하는 주체적인 예술가들의 에너지 자체로 느껴졌다.[7] 폐허, 유령 등으로 표현되지만 문자 집합 내 특수 기호같이 내용뿐만 아니라 내용을 강조하거나 잇고 엮는 역할로 기능한다. 현재 시점에서 이들 자신이 서로에게 가장 중요한 환경의 구성 요소이기 때문이다.[8] 이 지점이 신생 공간의 모든 존속 이유는 아니지만 또 하나의 낯선 경험을 풀어 보자면, 당시 개인전 오프닝에 온 관람객 중 상당수가 내가 모르는 사람이었다. 비약일 수도 있지만 내가 그러했듯이 자신이 만든 타임라인을 따라 탈영역 우정국의 공간을 통과하는 자로 짐작해본다.   

2.


     2014년 개인전 <사라의 짐>은 망원동에 위치한 Alter Ego[9]에서 선보였다. 간판이 없고 은은한 조명이 잘 어울리는 회색 조의 벽, 공간 특유의 시그니처 향이 가득한 곳이었다. 공간 대표의 감각과 취향이 예민하게 녹아있어 작품과 공간의 균형감이 중요했다. 공간 안쪽의 서재 스타일의 응접실은 사적인 관계자들과의 소모임이나 스터디로 북적였고 때때로 낯선 관람객과의 대화로 기분 좋은 균열이 일어나곤 했다. 전시를 준비하며 동시에 책을 제작하는데 힘을 쏟았고, 고민 끝에 독립출판물로 출간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NEMO에서 개최한 언리미티드 에디션에 참여하였다.[10] 내가 경험하지 못한 낯선 문화예술 현장이었다. 아트 페어나 북 페어와는 다른 분위기의 폐쇄성이 있었다.[11] 각자의 자리에 놓인 책이 한 권, 한 권 주인을 찾아가고 참여자 모두의 박수가 쏟아지는 순간은 참 근사한 따로 또 같이의 경험이었다. 당시 나는 책 <사라의 짐>을 읽을 독자 범위를 가늠하지 못했고, 책을 판매할 공간 파악도 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실질적인 판매량은 극도로 적었다. 오히려 얼마나 내가 기존의 갤러리나 아트 페어의 소비 환경에 익숙해져 있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다음 해 일민 미술관에서 열린 언리미티드 에디션은 다른 태도로 참여했다. 내 자리에 스쳐 가는 모든 이들에게 설명과 소개를 반복했고 짧은 찰나지만 대화를 나눴다. 미술관이 아트북/독립출판물 페어의 장소가 될 때 공간의 기류는 상당히 달라진다.[12] 전시와 판매의 성격을 이용하여 벽에 작은 원화 조각을 붙여 책을 구매하는 분에게 하나씩 떼어 선물했다. 실시간으로 SNS 채널에 현장의 분위기와 나의 이벤트를 게재했고, 다른 작가의 책도 소개했다. 판매 성과는 만족스러웠다. 행사가 끝날 때 또 박수가 터졌다. Alter Ego와 언리미티드 에디션의 공간은 반쯤 열린 문과 같다. 공간의 긴장성은 집중과 선택의 즐거움을 준다.

3.

2009년 보안여관에서 열린 재개발 도시의 현장은 2016년 탈영역 우정국에서 내가 바라본 개발 도시의 풍경과 만났다고 생각한다. 낭만적인 접근 같지만, 과거의 연결은 어떤 공간에서 펼쳐질 누군가의 또 다른 도시 풍경과 이어지기 위한 미래의 치열함을 동반한다. 또렷한 고집이 만들어낸 공간의 냄새는 기억을 오래 머무르게 만들고 자연스럽게 사라졌다가 또 다른 어느 곳에서 나타난다.[13] 새로운 반복은 같은 일을 되풀이하지만 되돌리기의 의미보다 조금씩 바꾸어 새로 고침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공간이 행위를 연결하는 요소가 될 수 있다. 공간에는 사람이 있다. 내가 공간에서 무엇을 하면 공간과 나 사이에 이력과 인연이 동시에 발생한다. 이 당연함을 때로 잊는다. 여러 오차와 실수를 거듭하며 느낀 점은 내가 적극적으로 공간-물리적으로 닫힌 곳이 아닌 넓은 범위의 장소성을 포함한-감각할수록 양질의 하이픈이 생긴다는 것이다. 공간이 존재하는 이유와 내가 공간을 필요로 하는 이유가 반드시 동일할 필요는 없으며, 다만 실행 이후 각자의 방향이 중요하다. 새로운 반복을 위한 하이픈으로서의 공간이 필요하다면 나 역시 공간을 위한 하이픈이 되는 것이다. 거창한 말 같지만, 위의 사례처럼 공간에 따른 낯선 경험들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좋은 점, 배울 점으로 체화하고 내가 없는 그리고 없을 공간의 시간을 지켜보는 자세는 이후의 나에게 용기를 준다.[14]

+ 그저 나의 마음에 안정감을 주는 공간도 필요하다. 돌아올 곳이 있다는 건 참 근사하다.[15] 상수동에 위치한 카페 커피발전소에서 이 원고의 삼 분의 일을 완성했다.





[1] 1002번째 밤: 2010년대 서울의 미술들』, 윤원화, p. 42
[2] 2012년을 전후하여 반지하, 시청각, 커먼센터 등의 새로운 공간들이 속속 문을 열고 있다. 그 이전에 오픈한 몇몇 갤러리들이 있지만, 이러한 공간들이 주로 언급되는 것은 기존의 방식들과 어떤 차별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겠다. 우선 공간의 주체가 기획자, 작가, 디자이너 등으로 복합적이다 보니 운영 방식이 미술계 내부로만 머물러 있지 않다. 다른 표현으로, 온전히 기존 미술계의 시선으로만 공간들을 들여다 볼 수가 없다. 전시와 프로젝트 등의 내용성보다는 다각화의 모색에 더 관심을 기울이는 듯 하다. 대안-공간인가, 바이홍, 『메타유니버스: 2000년대 한국미술의 세대, 지역, 공간, 매체』, P. 162
[3] 1942년부터 2004년까지 실제 여관이었고 2007년 복합문화예술공간으로 개관하였다.
[4] 신생공간의 약진은 중심과 주변의 위치감각을 만들던 여러 가치에 위협을 가한다. 그뿐만 아니라 어디가 중심인지도 잊어버리게 혹은 그런 사실들을 무시하도록 이끄는 장치로 작동한다. 단순히 말해서, 신생공간의 활동들은 매우 많다. 서울의 인스턴트 던전들, 강정석, 『메타유니버스: 2000년대 한국미술의 세대, 지역, 공간, 매체』, P. 93
[5] 1세대 대안공간 이후 2~3세대와 같은 특정 세대를 나누는 일이 주류에 가까운가 / 아닌가의 문제를 떠올리게 하는 것은 이후 세대들의 활동과도 연관되어 있다. 바꿔 말하면 제도화된대안공간의 권력 관계 아래서 어떻게 재영토화하느냐, 하는 이중고이기도 하다. 꽤나 많은 신생공간들이 기존 대안공간의 활동을 반영/확장하다가 사라지고 나타나기를 반복하고 있다. 대안-공간인가, 바이홍, 『메타유니버스: 2000년대 한국미술의 세대, 지역, 공간, 매체』, P. 150
[6] 서울의 인스턴트 던전들, 강정석, 『메타유니버스: 2000년대 한국미술의 세대, 지역, 공간, 매체』, P. 81
[7] 공간들의 전시를 접할 기회가 기존 미술 잡지나 온라인 아카이브 채널이 아닌 순전히 내가 엮은 SNS 타임라인으로 주로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8] 그럼에도 이 미술가들이 흩어졌다 모이기를 반복하는 것은, 현재 시점에서 이들 자신이 서로에게 가장 중요한 환경의 구성 요소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독창적 개인이라는 미술가의 신화와 싸우기 전에, 개인이 판단과 행위의 최소 단위로서-이를 테면 미술가로서-과연 어떻게 존속하고 작동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와 대결해야 한다. 1002번째 밤: 2010년대 서울의 미술들』, 윤원화, p. 173
[9] 현대 미술 애호가이자 콜렉터가 만든 프라이빗한 공간으로 콜렉터의 취향과 기호에 따른 기획전이 주로 열린다.
[10] 전시장에서 책을 보는 사람과 독립출판서점에서 책을 보는 사람은 다르다. 의도와는 다르게 전시장에서의 책은 도록의 기능이 붙어 전시를 보조한다.
[11] 나는 독립출판이 조금 더 들썩이는 판이 되려면 폐쇄적인 채로 교류가 일어나는 곳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교류는 제작자끼리의 것이 아니라 다른 신(scene)이나 기성의 출판과의 교류를 말한다. 흔히 그럴 이유가 없다고 판단되는 유명 작가나 미술가가 50부 한정본을 발간하거나, 독립출판물이 해외에 번역돼 소개되거나, 이 씬의 작가가 대형 출판사와 작업을 하는 등의 일 말이다이로 인터뷰, "내겐 너무 소중한 '독립출판', "『아트인컬처』, 2014.12월호
[12] 인 더 페이퍼 갤러리(1), 플래툰 쿤스트할레(2,3), 무대륙(4,5), NEMO(6) 등으로 이동해왔다. 섭외가 가능한 곳 중 참가팀을 수용할 수 있으면서 UE의 성격을 설득하지 않아도 되는 공간을 주로 찾았다. 상시적으로 페어를 여는 곳도 배제했다. 우리가 사용하면서 그 공간의 본래 성격과 다른 장면을 연출해 내는 걸 지향한다. 이로 인터뷰, "내겐 너무 소중한 '독립출판', "『아트인컬처』, 2014.12월호
[13] 기억의 부재속에서, 폐허는 응당 읽을 수 없기에 누구도 크게 괴롭히지 않는 아련한 공허로, 그저 어디서 본 것 같은 또 하나의 권태로운 스타일로 무기력하게 재생산된다. 1002번째 밤: 2010년대 서울의 미술들』, 윤원화, p. 79
[14] 문화생산에 대한 가장 좋은 정의 중 하나는 공공의 것을 만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서로 연대하고 관계를 확립하는 과정이며 쟁점, 사람, 맥락과 친구가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정이라는 것은 일을 시작하기 위한 기반인 동시에 생산의 차원을 의미한다. 바라보기에는 너무 가까운, 우정에 관한 소고-요한 프레데릭 하틀과의 대화, 셀린 콘도렐리, 『스스로 조직하기』, P. 81
[15] 마구잡이식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사라지는 것들에 맞서 일상의 반경을 가꾸고 지키는 사람들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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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0/2018

[기고] 답 없는 공간 : 근사한 악몽


답 없는 공간: 근사한 악몽

Z-After collective magazine Vol.2 (2018)

단어와 문장에 멋을 부리면 안 될 것 같다. 도달할 수 없을 것 같고 그렇다고 되돌아갈 수도 없는 상황에 은유나 수식어구를 생각할 여유따위는 없다. 말더듬이가 되어버렸다. , , , 그러니까, , 저는, , , , 아무것도 모, 모르겠어요. 나는 간신히 그에게 내 상황을 알렸다.


얼마나 미쳤는지 계속 돌고 있어. 보이는 모든 것위에 반투명 막이 덮이고, 보일듯 말듯 나를 유혹하지. 막 위에는 공사중 표지가 세워졌어. 표지는 반복해서 신호를 보내. 빨강, 초록, 노랑, 하얀 빛이 번쩍번쩍 거리거나 바람에 방향에 따라 바람개비처럼 회전하거나 어둠 속에서 야광을 뿜어내지. 나는 그것을 계속 지켜봐. 보고 또 봐. 처음엔 투명하게 보이던 것들이, 반투명에서 하얗게 변하더니 어느새 단단하게 굳어버렸어. , 이런 느낌이 아니었을까? 맞아?”


 침묵으로 대응하는 시간이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고 주변의 시간을 훑는다. 걷기 시작한다. 땅에 떨어진 출처를 알 수 없는 물건들, 보도블럭 사이 자라난 들풀, 전봇대를 감싸고 있는 덩쿨, 이상하게 적재된 쓰레기와 대충 만든 간판을 본다. 적당히 보고 스친다. 변두리의 널부러진 풍경엔 유행 지난 노래가 24시간 흘러 나왔다. 어느새 내 귀에 찰싹 붙어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고, 귀머거리가 되어버렸다. 더이, , 이상, 들을 수, , 수가 어, 없어, . 나는 간신히 그에게 내 상태를 알렸다.


너에게 어느새 눈이 생겼지. 구멍이야. 눈이지만 뻥 뚫려있지. 눈구멍 뒤로 하얗게 굳은 덩어리가 보여. 네가 보는 세상은 움직이고 있는데 정지되었고. 시간이 가는데 언제인지 알 수 없지. 이게 말이 돼? 너는 말을 하기 시작해. 다 돌려놔. 너를 만나기 전에 내 모습으로. 추억으로 돌리기엔 내 상처가 너무 커.* 맞지? 이런 느낌이지? 맞아?”


 우리는 꽤 진지하게 대화를 나눴지만 숨표과 쉼표만 남은 느낌이었다. 솔직하게 말 할 수록 구차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의 따뜻한 말투에 빨려들었다가 금새 빠져나왔다. 부드러운 그의 눈길을 피해 눈을 감았다. 눈을 감고 있는 시간이 길어질 수록 그는 가늘고 긴 실루엣이 되었고, 풍경은 싸구려 폭죽같은 섬광이 되었다. 나는 그렇게 일시적으로 눈이 멀었다. 더이상 그에게 나를 알리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순식간에 조용한 소음이 되었다.   

*가수 김현정의 가사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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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3/2018

[리뷰] 2018 쉐어 프로젝트: 실험실

담담한 리뷰’ 2018 쉐어 프로젝트: 실험실 1

쉐어 프로젝트는 창작자가 서교예술실험센터의 공간을 말 그대로 쉐어하며 자신의 작업을 요모조모 부담 없이 실험해볼 수 있는 사업이다. 이 기간에 창작자는 평소에 해보지 못했던 아이디어를 마음껏 실행하거나 실패할지도 모르지만 꼭 해보고 싶었던 시도를 반복하여 더 나은 결과를 유추해 볼 수 있다. 관객으로부터 작업 과정 자체에 관한 피드백을 기대해볼 수도 있다.

하소정, <1/4평의 시간>
나는 세 번 정도 공간을 방문하여 이들의 시간을 지켜보았고 첫날은 가볍게 휘휘 둘러보았다. 이날 하소정 작가는 투명한 유리로 사방이 오픈된 아트 인포 공간 안에서 나무 조각을 깎고 있었다. 하루에 6시간씩 근 열흘 동안 매일 이곳에서 나무를 깎아 숟가락을 만들고, 남은 톱밥은 관을 상징하는 상자에 채우는 실험이다. 나무의 잔재를 관에 적재하는 반복행위는 죽음을 관조하면서도 대응하는 작가의 태도와 맞닿아있다. 다시 그를 찾아갔을 땐 네다섯 개의 태가 고운 나무 숟가락이 바닥에 놓여 있고, 관에도 톱밥이 두툼하게 채워져 있었다. 12시간을 쉼 없이 깎으면 한 개의 숟가락이 완성된다고 한다. 관객과의 에피소드가 있었는지 물었다. 작가는 나무 깎는 요령이 생겼는지 손을 쉬지 않으며 말을 이었다. 이상하게도 한 남자가 거칠게 던진 질문이 계속 맴돈다고 한다. 그 남자는 숟가락을 팔기도 하는지, 왜 여기에 있는지 시비조로 묻다가 마지막에 당신이 작가임을 어떻게 증명합니까?”라고 물었다고 한다. 나무를 깎는 노동이 관객에 의하여 예술적 행위로 치환되는 순간이다. 또한, 예술가로서의 발화가 선명해져야 할 순간이 아니었을까 가늠해본다.

신지언, <무위(無爲)를 위하여>
신지언 작가의 <무위(無爲)를 위하여>는 그가 쓴 단편 소설을 인쇄하여 벽에 붙이고 이를 읽은 관객이 자유롭게 밑줄을 긋거나 표시를 남길 수 있는 실험으로, 이러한 개입은 작가의 사전 계획에 따르면 작가의 생각이 담긴 글을 분절하면서 동시에 강조하는 표현이자 작업의 마무리이다. 펜을 들고 시간을 들여 글을 읽었다. 같은 구절에 여러 겹의 밑줄이 쳐 있기도 하고, 물결 모양의 선, 거친 느낌의 직선, 동그라미 등 다양한 표식이 문장 위에 흩뿌려져 있다. 나도 마음에 와닿는 문장에 별을 그렸다. ‘아무것도 아님 혹은 없음을 삶과 예술의 의미로서 사유하는 그의 글은 눈에 보이지 않는 무위 세계를 여행자의 시선으로 그려낸다. 주인공이 던지는 수많은 물음과 답 사이의 시공간이 글을 읽는 각자의 마음속 풍경으로 대치되어, 나도 모르게 지금 내 마음 상태를 들여다보게 된다. 내 발이 딛고 있는 이곳이 글 속 표현처럼 실존의 도마같이 느껴졌고 오롯이 나 자신으로서 존재하기 위해 어떤 껍데기를 버려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그렇게 관객은 어느새 실험의 일부가 된다.

오서연, <뛰는 여자>
오서연 작가의 <뛰는 여자> 프로젝트를 보러 간 첫날, 센터 지하 공간은 다소 비어 있었다. 한쪽 벽에는 “37일 수요일. 나는 아무 생각이 없다. 왜냐하면 아무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기록이 단출하게 붙어 있고 또 다른 벽에는 지난 퍼포먼스 영상이 재생 중이었다. 작가는 이곳을 개인 작업실이자, 관객이 참여하는 워크숍 룸, 아카이브 룸으로 활용하였다. <뛰는 여자>는 외모 강박에 갇힌 여성의 고충을 인터뷰, 연극, 퍼포먼스, 그림 등 다양한 방식으로 풀어내는 프로젝트로서 즉흥성과 게릴라성, 관객 참여에 따라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는 구조를 띠고 있다. 페이스북 페이지를 통해 다음 퍼포먼스 일정을 체크했고 두 번째로 이곳을 방문했을 때 그는 센터 밖에서 몸을 풀고 있었다. 다이어트를 위해 매일 뛰어야 하는 한 여자의 고통스러운 몸짓이 외모에 대한 지적과 시선으로부터 힘껏 탈주하는 자유로운 몸짓으로 바뀔 때, 나도 모르게 내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그녀의 뜀박질은 누구나 한 번쯤은 겪었을 사회 구조의 억압에 대항하는 움직임이자 우리 모두를 향한 응원의 기록이 될 것이다.

쉐어 프로젝트가 열리는 시기의 센터는 조금만 관심 있게 들여다보면 작업하다 남은 흔적, 기록의 파편으로 가득했다. 작가의 작업 과정이 자연스럽게 완성을 예고한다. 하소정 작가는 이번 실험을 다음 작업의 요긴한 데이터베이스로 사용할 예정이며, 신지언 작가는 관객이 밑줄 친 자신의 문장을 더듬으며 더욱 깊은 무위를 찾아갈 것이다. 실제로 <뛰는 여자>의 내러티브는 실험을 거듭할수록 확연히 풍성해졌다. 이들의 다음 실험이 그리고 어디에선가 만날 완성작이 많이 궁금해진다.

text by 봄로야 
COPYRIGHT © Bom,roya / 서울문화재단 서교예술실험센터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