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1/2018

[포럼] 새로운 반복을 위한 하이픈(hyphen)


2018 프린지 페스티벌 올모스트프린지: / 예술가에게 필요한 공간은 어디인가? /

새로운 반복을 위한 하이픈(hyphen)

. 봄로야 (시각 예술 작가, 기획자)

* 이 글은 기획팀과의 사전 논의를 거쳐 개인적인 경험에서 비롯한 공간사용법을 다룬다. 주로 시각 예술 분야와 관련하여 회고한 에세이에 가깝다. 시점이 있다. 각주를 본문처럼 활용하였다. 각주 1, 6, 8번은 직접 인용, 나머지는 글에 따른 보조글로 덧붙였다.

약속된 미래가 제때 도착하지 않은 곳마다 폐허가 생겨났지만,
현재를 과거로 밀어내고 그 자리에 미래를 소환하려는 몸부림은 멈추지 않았다.
미술이 폐허와 대면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1]

1.

2016년 소위 신생공간으로 인식되는 탈영역 우정국에서 개인전을 열고 싶은 이유는 우체국이었던 과거의 시간이 전시장에 흔적처럼 묻어있고, 이곳에서 진행한 전시 및 프로그램의 장르가 다양했기 때문이다. 개인전의 주제는 작업을 지속하는데 느낀 불안과 두려움을 중심에서 변두리로 생활의 반경을 옮기며 맞닥뜨린 개발도시의 풍경과 연결한 프로젝트였다. 음악, 영상, 목소리, 글 등 장르별 종사자와의 협업 방식은 탈영역 우정국의 공간적 특성과 상당 부분 어울렸다고 생각한다.[2] 이 같은 나와 공간의 상생 구조를 이번 포럼과 관련하여 신생공간의 특성과 연결 지어 보고자 한다. 한 예로, 2009년 보안여관[3]에서 열린 전시 <휘경, 사라지는 풍경>(2009)은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에 거주하거나 작업을 하는 작가 6인이 재개발로 철거되는 도시 광경을 사유했다. 전시를 직접 보지 못했지만, 주제와 보안여관의 역사, 건물의 골조가 거칠게 드러난 공간의 분위기와 조화로웠을 것 같다. 내가 전시 장소를 탈영역 우정국으로 선택한 이유와 다소 유사한 부분이 있다. 그런데 만일 탈영역 우정국과 보안 여관 중 한 곳에서 개인전을 열어야 한다면(행복한 가정) 나는 어느 곳을 선택했을까? 아마도 탈영역 우정국을 염두했을 것이다. 거주지역에 생뚱맞게 위치한 이질감과 어느 정도 구축된 화이트 큐브의 전시장 분위기가 자칫 도시성으로 치우치기 쉬운 작업 주제를 중화시켜주고, 작업에 담긴 사적인 작가의 생활과 고민이 그곳을 드나드는 작가나 관람객의 층위와 더 적합했기 때문이다. 공간 운영자와의 교류가 더 쉽고 익숙했다는 점도 지나칠 수 없다.

2010년도 이래로 생성과 종료를 반복하고 있는 신생공간[4]은 주류와 비주류, 권력의 재분배 기준으로 판단될 여지가 큰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중반에 생긴 대안공간과는 다른 양상으로 해석된다.[5] 많은 신생공간은 그저 전체 미술계에 연결link만 되어있는 채로 작가와 전시, 공연 등이 지나가는 통로를 구성한다.[6] 예술가로서의 작업 환경과 활동 반경을 전시 공간에 포함하여 맥락화하는 방식을 목격하며, 우선 나의 관람 태도를 바꿔야 했다. 예약해야만 방문할 수 있거나 창문을 넘어 들어가야 했다. 단지 전시를 보러 갔을 뿐인데 누군가의 작업실에 침입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내가 적극적으로 개입이 될 때가 있지만 그대로 투과되어버릴 때도 있었다. ‘라는 존재가(예술가이든, 관람객이든) 굳이 필요하지 않을 때도 있다는 뜻이다.

이 낯선 기분은 분주히 돌아가는 주류 담론의 판을 위시하지 않으면서도 서로의 장력을 확인하고 관계를 모색하는 주체적인 예술가들의 에너지 자체로 느껴졌다.[7] 폐허, 유령 등으로 표현되지만 문자 집합 내 특수 기호같이 내용뿐만 아니라 내용을 강조하거나 잇고 엮는 역할로 기능한다. 현재 시점에서 이들 자신이 서로에게 가장 중요한 환경의 구성 요소이기 때문이다.[8] 이 지점이 신생 공간의 모든 존속 이유는 아니지만 또 하나의 낯선 경험을 풀어 보자면, 당시 개인전 오프닝에 온 관람객 중 상당수가 내가 모르는 사람이었다. 비약일 수도 있지만 내가 그러했듯이 자신이 만든 타임라인을 따라 탈영역 우정국의 공간을 통과하는 자로 짐작해본다.   

2.

     2014년 개인전 <사라의 짐>은 망원동에 위치한 Alter Ego[9]에서 선보였다. 간판이 없고 은은한 조명이 잘 어울리는 회색 조의 벽, 공간 특유의 시그니처 향이 가득한 곳이었다. 공간 대표의 감각과 취향이 예민하게 녹아있어 작품과 공간의 균형감이 중요했다. 공간 안쪽의 서재 스타일의 응접실은 사적인 관계자들과의 소모임이나 스터디로 북적였고 때때로 낯선 관람객과의 대화로 기분 좋은 균열이 일어나곤 했다. 전시를 준비하며 동시에 책을 제작하는데 힘을 쏟았고, 고민 끝에 독립출판물로 출간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NEMO에서 개최한 언리미티드 에디션에 참여하였다.[10] 내가 경험하지 못한 낯선 문화예술 현장이었다. 아트 페어나 북 페어와는 다른 분위기의 폐쇄성이 있었다.[11] 각자의 자리에 놓인 책이 한 권, 한 권 주인을 찾아가고 참여자 모두의 박수가 쏟아지는 순간은 참 근사한 따로 또 같이의 경험이었다. 당시 나는 책 <사라의 짐>을 읽을 독자 범위를 가늠하지 못했고, 책을 판매할 공간 파악도 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실질적인 판매량은 극도로 적었다. 오히려 얼마나 내가 기존의 갤러리나 아트 페어의 소비 환경에 익숙해져 있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다음 해 일민 미술관에서 열린 언리미티드 에디션은 다른 태도로 참여했다. 내 자리에 스쳐 가는 모든 이들에게 설명과 소개를 반복했고 짧은 찰나지만 대화를 나눴다. 미술관이 아트북/독립출판물 페어의 장소가 될 때 공간의 기류는 상당히 달라진다.[12] 전시와 판매의 성격을 이용하여 벽에 작은 원화 조각을 붙여 책을 구매하는 분에게 하나씩 떼어 선물했다. 실시간으로 SNS 채널에 현장의 분위기와 나의 이벤트를 게재했고, 다른 작가의 책도 소개했다. 판매 성과는 만족스러웠다. 행사가 끝날 때 또 박수가 터졌다. Alter Ego와 언리미티드 에디션의 공간은 반쯤 열린 문과 같다. 공간의 긴장성은 집중과 선택의 즐거움을 준다.

3.

2009년 보안여관에서 열린 재개발 도시의 현장은 2016년 탈영역 우정국에서 내가 바라본 개발 도시의 풍경과 만났다고 생각한다. 낭만적인 접근 같지만, 과거의 연결은 어떤 공간에서 펼쳐질 누군가의 또 다른 도시 풍경과 이어지기 위한 미래의 치열함을 동반한다. 또렷한 고집이 만들어낸 공간의 냄새는 기억을 오래 머무르게 만들고 자연스럽게 사라졌다가 또 다른 어느 곳에서 나타난다.[13] 새로운 반복은 같은 일을 되풀이하지만 되돌리기의 의미보다 조금씩 바꾸어 새로 고침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공간이 행위를 연결하는 요소가 될 수 있다. 공간에는 사람이 있다. 내가 공간에서 무엇을 하면 공간과 나 사이에 이력과 인연이 동시에 발생한다. 이 당연함을 때로 잊는다. 여러 오차와 실수를 거듭하며 느낀 점은 내가 적극적으로 공간-물리적으로 닫힌 곳이 아닌 넓은 범위의 장소성을 포함한-감각할수록 양질의 하이픈이 생긴다는 것이다. 공간이 존재하는 이유와 내가 공간을 필요로 하는 이유가 반드시 동일할 필요는 없으며, 다만 실행 이후 각자의 방향이 중요하다. 새로운 반복을 위한 하이픈으로서의 공간이 필요하다면 나 역시 공간을 위한 하이픈이 되는 것이다. 거창한 말 같지만, 위의 사례처럼 공간에 따른 낯선 경험들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좋은 점, 배울 점으로 체화하고 내가 없는 그리고 없을 공간의 시간을 지켜보는 자세는 이후의 나에게 용기를 준다.[14]

+ 그저 나의 마음에 안정감을 주는 공간도 필요하다. 돌아올 곳이 있다는 건 참 근사하다.[15] 상수동에 위치한 카페 커피발전소에서 이 원고의 삼 분의 일을 완성했다.





[1] 1002번째 밤: 2010년대 서울의 미술들』, 윤원화, p. 42
[2] 2012년을 전후하여 반지하, 시청각, 커먼센터 등의 새로운 공간들이 속속 문을 열고 있다. 그 이전에 오픈한 몇몇 갤러리들이 있지만, 이러한 공간들이 주로 언급되는 것은 기존의 방식들과 어떤 차별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겠다. 우선 공간의 주체가 기획자, 작가, 디자이너 등으로 복합적이다 보니 운영 방식이 미술계 내부로만 머물러 있지 않다. 다른 표현으로, 온전히 기존 미술계의 시선으로만 공간들을 들여다 볼 수가 없다. 전시와 프로젝트 등의 내용성보다는 다각화의 모색에 더 관심을 기울이는 듯 하다. 대안-공간인가, 바이홍, 『메타유니버스: 2000년대 한국미술의 세대, 지역, 공간, 매체』, P. 162
[3] 1942년부터 2004년까지 실제 여관이었고 2007년 복합문화예술공간으로 개관하였다.
[4] 신생공간의 약진은 중심과 주변의 위치감각을 만들던 여러 가치에 위협을 가한다. 그뿐만 아니라 어디가 중심인지도 잊어버리게 혹은 그런 사실들을 무시하도록 이끄는 장치로 작동한다. 단순히 말해서, 신생공간의 활동들은 매우 많다. 서울의 인스턴트 던전들, 강정석, 『메타유니버스: 2000년대 한국미술의 세대, 지역, 공간, 매체』, P. 93
[5] 1세대 대안공간 이후 2~3세대와 같은 특정 세대를 나누는 일이 주류에 가까운가 / 아닌가의 문제를 떠올리게 하는 것은 이후 세대들의 활동과도 연관되어 있다. 바꿔 말하면 제도화된대안공간의 권력 관계 아래서 어떻게 재영토화하느냐, 하는 이중고이기도 하다. 꽤나 많은 신생공간들이 기존 대안공간의 활동을 반영/확장하다가 사라지고 나타나기를 반복하고 있다. 대안-공간인가, 바이홍, 『메타유니버스: 2000년대 한국미술의 세대, 지역, 공간, 매체』, P. 150
[6] 서울의 인스턴트 던전들, 강정석, 『메타유니버스: 2000년대 한국미술의 세대, 지역, 공간, 매체』, P. 81
[7] 공간들의 전시를 접할 기회가 기존 미술 잡지나 온라인 아카이브 채널이 아닌 순전히 내가 엮은 SNS 타임라인으로 주로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8] 그럼에도 이 미술가들이 흩어졌다 모이기를 반복하는 것은, 현재 시점에서 이들 자신이 서로에게 가장 중요한 환경의 구성 요소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독창적 개인이라는 미술가의 신화와 싸우기 전에, 개인이 판단과 행위의 최소 단위로서-이를 테면 미술가로서-과연 어떻게 존속하고 작동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와 대결해야 한다. 1002번째 밤: 2010년대 서울의 미술들』, 윤원화, p. 173
[9] 현대 미술 애호가이자 콜렉터가 만든 프라이빗한 공간으로 콜렉터의 취향과 기호에 따른 기획전이 주로 열린다.
[10] 전시장에서 책을 보는 사람과 독립출판서점에서 책을 보는 사람은 다르다. 의도와는 다르게 전시장에서의 책은 도록의 기능이 붙어 전시를 보조한다.
[11] 나는 독립출판이 조금 더 들썩이는 판이 되려면 폐쇄적인 채로 교류가 일어나는 곳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교류는 제작자끼리의 것이 아니라 다른 신(scene)이나 기성의 출판과의 교류를 말한다. 흔히 그럴 이유가 없다고 판단되는 유명 작가나 미술가가 50부 한정본을 발간하거나, 독립출판물이 해외에 번역돼 소개되거나, 이 씬의 작가가 대형 출판사와 작업을 하는 등의 일 말이다이로 인터뷰, "내겐 너무 소중한 '독립출판', "『아트인컬처』, 2014.12월호
[12] 인 더 페이퍼 갤러리(1), 플래툰 쿤스트할레(2,3), 무대륙(4,5), NEMO(6) 등으로 이동해왔다. 섭외가 가능한 곳 중 참가팀을 수용할 수 있으면서 UE의 성격을 설득하지 않아도 되는 공간을 주로 찾았다. 상시적으로 페어를 여는 곳도 배제했다. 우리가 사용하면서 그 공간의 본래 성격과 다른 장면을 연출해 내는 걸 지향한다. 이로 인터뷰, "내겐 너무 소중한 '독립출판', "『아트인컬처』, 2014.12월호
[13] 기억의 부재속에서, 폐허는 응당 읽을 수 없기에 누구도 크게 괴롭히지 않는 아련한 공허로, 그저 어디서 본 것 같은 또 하나의 권태로운 스타일로 무기력하게 재생산된다. 1002번째 밤: 2010년대 서울의 미술들』, 윤원화, p. 79
[14] 문화생산에 대한 가장 좋은 정의 중 하나는 공공의 것을 만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서로 연대하고 관계를 확립하는 과정이며 쟁점, 사람, 맥락과 친구가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정이라는 것은 일을 시작하기 위한 기반인 동시에 생산의 차원을 의미한다. 바라보기에는 너무 가까운, 우정에 관한 소고-요한 프레데릭 하틀과의 대화, 셀린 콘도렐리, 『스스로 조직하기』, P. 81
[15] 마구잡이식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사라지는 것들에 맞서 일상의 반경을 가꾸고 지키는 사람들을 응원한다.